스스로에게 내뱉은 자괴적인 물음은, 마주치는 삶의 고비마다 유효했다. 나 하나 건사하기 고달프던 때 만난, 나를 사람답게 해주는 연인은 존재가 호사였다. 하지만 결혼을 전제로 하지 않은 연애는 연인과 가족들로부터 진지하지 못한 듯 여겨졌다.
나는 ‘가부장적 정상가족’ 틀에서 벗어나고 싶었으나 부모에게 딸의 독립이란 결혼과 다름 아니었다. 지난한 설득이 오간 뒤에도 ‘결혼을 한다면 독립을 허한다’는 모순된 결론이기 일쑤였다.
스스로에게 내뱉은 자괴적인 물음은, 마주치는 삶의 고비마다 유효했다. 나 하나 건사하기 고달프던 때 만난, 나를 사람답게 해주는 연인은 존재가 호사였다. 하지만 결혼을 전제로 하지 않은 연애는 연인과 가족들로부터 진지하지 못한 듯 여겨졌다.
나는 ‘가부장적 정상가족’ 틀에서 벗어나고 싶었으나 부모에게 딸의 독립이란 결혼과 다름 아니었다. 지난한 설득이 오간 뒤에도 ‘결혼을 한다면 독립을 허한다’는 모순된 결론이기 일쑤였다.
몇 년 사이 ‘엄마’를 이야기하는 출판물이 쏟아졌다. 어쩌다 엄마가 됐고, 엄마는 처음이라서, 서툴지만, 엄마로만 살지 않고, 뻔뻔해지기로 결심했다, 반성도 하지만, 엄마는 페미니스트라는(또는 페미니스트여야 함을 주장하는) 제목들이 눈에 띈다.
반가운 일이다. 엄마는 그동안 ‘여자’만큼이나 줄기차게 호명되면서도 스스로 발화의 주체가 되지 못한 대상이었다. 인내와 희생, 따뜻하고 강인함의 존재로 통칭되다가 최근에야 하나, 둘 개별적 엄마를 이야기하고 주목하니 말이다. 엄마가 무엇이기에 그동안 숨죽여 왔으며 이제는 이렇게 분연히 일어나는 걸까? 애 좀 낳았다고 호들갑스레 유세하는 건가?
작년 이맘때 영화 ‘리틀 포레스트’가 개봉했을 무렵이었다. 늘 품고 사는 귀촌 본능과 농사를 짓고 싶다는 욕구에 불을 붙인 이 영화가 텃밭 행에 한몫을 했다. 물론 같은 ‘농사’라는 단어로 자녀 양육과 이를 연결한 연구와 글들도 영향을 미쳤다.
2019년의 시작이 불과 열흘밖에 남지 않았다. 2018년 국정감사를 뜨겁게, 그리고 유일하게 달군 키워드였던 유치원 비리 근절. 하지만 국회는 두 달째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걷고 있다.
유치원 비리가 어떻게 가능할까? 그 많은 돈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유치원 비리는, 결국 자라나는 아이들의 건강권 그리고 안전과 맞바꾼 대가를 지불하고서야 가능해진다. 다시 말해, 우리가 유치원 비리를 근절하지 못한다면, 아이들의 건강이, 안전이, 교육권이 현재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위협받을 거란 이야기다.
안정적인 환경에서 아이를 기르는 문제는 육아의 중요한 가치로 여겨진다. ‘안정적’인 기준의 정도가 다소 달라질 뿐이다. 주택의 노후도, 의료 인프라, 교육여건, 유해시설 유무, 주변 자연환경 등을 고려하지만 현실적으로 자금 확보의 여력과 출퇴근 시간의 정도까지 생각하면 동네를 고르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