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매서운 질문을 던지는 아이의 당당함이 부러웠다 (윤일순)

2016년, 꿈틀비행기6호를 타고 덴마크에 다녀왔다. 보육교사 생활 20년차, 강산이 변해도 두 번은 변했어야 하는데 20년 동안 포장지만 바뀌고 화려해지지만, 기본 정책의 변화는 없었다.
 
1996년 보육교사교육원을 수료했고, 교육원을 수료하자 말자 남편 따라 서울로 이사를 왔다. 작은아이가 초등학교 6학년이어서, 뭐라도 하고 싶어 어린이집에 이력서를 넣고 면접을 보러 다녔다.

또 어떤 때는 내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싶다고 부모상담을 가기도 했다. 서울 강동구 천호동과 성내동 인근에 부모상담, 교사면접을 보러 다녔다. 그때는 놀이방(가정어린이집), 어린이집(20명 이상 시설, 민간, 국공립, 법인 등)으로 불리웠는데, 다양한 기관에 부모상담, 교사면접을 봤다.

내가 상상 하던, 내가 기대 하던 어린이집과 너무나 달랐다. 그렇게 허탈해 하고 있는데 <한겨레>에 교사모집 공고가 올라왔다. '강동공동육아협동조합', 부푼 마음을 가지고 7장의 지원서를 쓰고, 치마정장을 입고 교사면접을 봤다.

그때 37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보육교사교육원 출신이라는 이유로 면접에서 떨어졌을 것이라 추정한다. 그렇게 면접에 떨어트리고도 면접관들은 아쉬워하며 부모모임에 불렀다. 그 부모모임은 '강동공동육아협종조합 재미난어린이집'을 개원하기 위한 준비모임이었고, 그 모임에는 나와 비슷한 연령대의 부모들이 있어, 오지랖은 넓은 나는 공부하기 위해 부모모임에 나갔다.

그 모임에서 '공동육아연구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현장학교교사교육과정 6기를 수료했다. '현장학교 6기'를 수료하고 우면동에 있는 튼튼어린이집 반일제 교사를 했다. 그 3개월의 시간은 어린아이들, 유아들의 교육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다시금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다.

1996년 9월에 출발한 걸음이 20년 동안 공동육아와공동체교육(이하 공동육아)에서 교사로 원장으로 다양한 역할을 했다. 2005년 평가인증제도가 만들어지고 그 다음해인 2006년부터 현장관찰자 5년을 했으며, 2010년 가정어린이집을 개원하고, 설립주체가 개인이 어린이집이 운영하는 한계를 절감하면서 '공동육아' 기관회원이 되었다.

현장관찰자를 하면서, 어린이집의 현실을 보고 너무나 당황스러워 말문이 막힌 적이 몇 번이고, 머리에 피가 거꾸로 쏟았던 적이 몇 번 인지 모른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어린이집 현장이 변하리라, 충분히 변하리라 기대 했고, 그 역할에 충실히 수행 했다. 현장관찰자를 하면서 몇 번의 '갈등'도 만들었다.

'관찰한 것을 있는 그래도 보고 한다'라는 소신으로 1. 임면보고된 교사와 근무하고 있는 교사가 다른 사람이라는 것도 밝혀내었고, 2. 원장들이 어린이집을 여러 개 운영하면서 교사, 교구 등이 훼손되는 것들도 보고했고, 3. 국공립어린이집 담임교사가 아이들과 1도 상호작용 하지 않고, 시간연장반 교사가 아이들을 더 상호작용을 잘한 것, 그래서 평가인증 참여를 유보시키는 결과가 되었고 소송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래도 어린이집 현장이 변하기를 기대했다.

그런데 15년 넘게 살던 집을 비워야 하는 상황에서 이사 갈 집을 보러 다니다 그 집들 중에 아니 땅 중에 '어린이집'을 하면 너무 좋을 것 같아 새집을 짓고 가정어린이집을 시작했다. 가정어린이집을 졸업하면 유아들이 다니는 교육기관에 가야 하는 아이들이 졸업을 유보하고, 졸업시키면 다시 가정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 했다. 그래서, 그렇게 2012년에 민간어린이집을 개원했다.

꿈틀비행기

2016년 보육교사 20년. 그해 봄도 유아교육기관에서 아동학대가 많이 보고 되고 있었고, 이 변화하지 않는 '교육환경'을 보면서 교육기관의 안전, 물리적 환경을 고민하다, 꿈틀비행기를 알게 되었고, 꿈틀비행기6호를 타고 덴마크에 다녀왔다.

마침 꿈틀비행기6호는 교육의 변화를 이끌어내고 싶어 하는 공무원과 교사들로 꾸려져 있었다. 자기가 있는 현장에서 어떻게 꿈틀되고 있는가? 그리고 덴마크를 보면서 우리는 자기현장에서 어떻게 꿈틀되며 함께 지내는 아이들을 행복하게 할 것인가? 그 여행의 주제였다.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방문을 했다. 어느 교육기관을 방문하면서 한번도 울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눈물을 그냥 흘리는 정도가 아니라 펑펑 쏟아졌다. 아무리 참으려 해도, 눈물은 쏟아졌고, 함께 하고 이들에게 민망할 정도로 울고 또 울었다.

지금 성인되어 자기 역량만큼의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아들. 고등학교 입학하고 1달 다니고 자퇴했다. 아들의 변은 '학교가 변하지 않는다'였고, '공부는 멈추지 않고 할테니, 변하지 않는 학교는 그만 다니겠다'였다. 사실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는 일, 얼마나 모범생이었던 아들인가?

그런데 고등학교 등록 마지막 날 폭탄선언을 했고, 엄마는 6개월, 아들은 1달 다니고 결단을 하겠다는 거였고, 아들은 한 달 다니고 학교를 나왔다. 자퇴서를 쓰기 위해 학교를 방문했는데 선생님은 말했다. '학교에서 나간 아이들 중에 잘되는 아이 보지 못했다'라고. 이게 교사로서 학교를 떠나는 제자에게 축하하는 마지막 인사였다.

우리나라 자유학기제은 모델이 된 '에프터스콜레'를 보면서 어쩜 우리나라에도 이런 제도가 있었다면, 내 아이는 학교를 유지할 수 있지 않았을까 잠시 생각해 보았다.

덴마크에서 만나 교육기관들은 엄청난 물리적 환경을 갖고 있었다. 유치원의 경우 2000평의 녹지공간에 3개의 시설이 있고, 방문한 1개 시설은 70여 명의 아이들이 있었는데 700평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한 건물에 있었는데 7층 건물이었다. 운동장도 탁월했지만 그 층별 양쪽 끝을 개방하여 수업하다 힘들면 언제든지 몸을 풀 수 있는 시설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애프터스콜레 대부분 사립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했는데, 그 공간이 정말 놀라웠다. 그 공간에서 지내는 아이들은 똑 같은 나이는 아니었다. 중학교 졸업을 하고 가기도 하고, 고등학교 다니다가도 애프터스콜레로 갈 수 있다고 했는데, 100여 명의 아이들이 있었고, 음악실, 실내 체육관은 2개, 잔디축구장 3개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축구장이 더 필요하여 남자아이들은 마을에 있는 축구장에 가서 운동을 한다고 했다.

그리고 공립애프터스콜레도 방문을 했었다. 사립애프터스콜레는 숙박으로 운영하는 시설이었다면, 공립애프터스콜레는 집에서 학교 다니듯이 다니는 곳이다.

우리나라 학교는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별반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없는데, 여기 교육기관은 기관마다 그 기관이 갖고 있는 교육철학이 반영되어 있었다. 공립애프터스콜레는 마을 속에 있고, 마을에 있는 체육시설, 운동장을 함께 사용하고 있다고 했다. 현관을 들어서니 넓은 광장이 나왔고, 그 광장에서 언제든지 다른 사람을 배려하며 몸을 사용 할 수 있는 공간이 구성되어 있었다. 눈물과 함께 감탄사가 흘러 나왔다. 이게 진정 아이들을 위한 공간이다!

고등학교. 번화한 거리 안에 있었다. 방문한 곳은 최근 부모들이 선호하는 학교이고, 이곳으로 이사 오는 사람들이 많아 교실이 부족해서 학교와 떨어진 곳에 교실이 있다고 했다. 10분쯤 걸어가야 한다면서, 학교 본관과 떨어진 교실 사이에 있는 거리를 설명해 주었다.

어릴 때 덴마크는 '낙농국가'로 배웠다. 그 거리는 옛날 낙농국가 덴마크의 모습이 남아 있는데, 도축장으로 사용하던 마을이라고 했다. 그런데 현재는 카페 거리라고 했다. 마침 햇살이 너무 좋았다.

학생들은 수업을 받기 위해 이 거리를 10분쯤 걸어서 교실로 간다고 했다. 와~우 상상만 해도 멋진 일이다. 햇살이 좋은 날은 좋은 날 데로, 비가 오는 날은 비가 오는 데로 걷기에 너무나 좋았다. 그런데 우리나라 부모들이었다면, 동의 했을까? 선호 했을까? 생각했다.

달랐다

덴마크 교사들은 달랐다. 유치원의 원장선생님이 달랐다. 우리나라는 어제도 아파트 안에 있는 유치원원장님 차량 주차 추태로 참으로 부끄러웠는데, 덴마크 000유치원선생님은 소박했고 전문성이 돋보였다. 초중등학교 교장선생님도 그랬다. 그리고 모든 교사들의 전문성이 달라 보였다.

우리는 1인 1과를 가르친다면, 덴마크의 선생님들은 1+1과, 또는 1+2과를 가르쳤다. 기본과목에 체육, 예술교과가 포함되어 있었다. 수학을 체육시간에 배울 수 있으니, 얼마나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을까? 그러니 아이들의 수업은 통합적이고 예술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기서 만난 선생님들은 장난기가 가득했다.

그런데 이렇게 여유가 있을 수 있는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교사대아동비율이었다. 유치원의 경우 다양한 경험을 가진 선생님, 다 연령의 선생님이, 다양한 체계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리고 초등학교 한 개의 교실에 두 분의 선생님이 계셨다. 정담임과 지원교사, 이렇게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발달이나 정서적으로 어려운 아이들을 지원 할 수 있었고, 손님이 왔을 때 이렇게 환영의 인사를 나누고, 또 수업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이 지점에서 교사대아동비율의 문제를 다시 제기한다. 우리는 정녕 아이들과 교사들이 행복할 수 있는 교사대아동비율을 갖고 있는가?

아이들이 달랐다. 아이들의 다른 모습 사진 너무나 많이 갖고 있지만, 사과나무에 매달려 있는 이 사진, 이 장면은 정말 경이로웠다. 유치원 마당에 있는 사과나무. 사과가 매달려 있는지 아이들이 매달려 있는지 순간 혼돈이 왔고, 정말 기뻤다.

초중등학교 견학 중에 복도를 지나가는 아이들을 불러 세워 인터뷰를 했다. 아이들 몸은 말한다. 가만히 서 있는 모습조차 당당했다, 참으로 부러웠다. 애프터스콜레는 강당에서 아이들을 만났다. 여자 셋. 남자 셋. 여학생이든 남학생이든 아이들의 몸은 말하고 있다. 오후는 대부분 다양한 체육활동을 한다고 했는데, 온 몸은 말한다. '나 여기 있어요!'

본관에서 10분이나 떨어진 상가 건물에 있는 교실은, 수업을 마친 아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자유로운 모습. 수업은 매일 조금씩 다르나 2~3시이면 모두 끝나고, 알바를 하러 간다고 했다. 왜 알바를 하는지 질문했더니, 주말에 친구들이랑 놀러가기 위한 비용이라고 했다.

고등학교 3학년이 수업을 2~3시 사이에 마치고, 알바를 하고 주말이면 친구들과 캠핑을 간다는 이야기, 우리나라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인데...라며 머리가 혼미해져 있는데, 당찬 여자아이가 질문을 했다.

"대한민국도 초등학교 3학년부터 영어 공부를 한다고 했는데, 너희들은 왜 통역사를 통해서 질문을 하니?" 이 매서운 질문에 혼미한 머리는 한 대 맞은 것처럼, 순간 별이 번쩍했다. 그렇다. 우리 35명 중에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대학원생이 각 한명씩 있었는데, 우리는 모두 통역사를 통해 질문했다. 자유로운 복장을 하고, 매서운 질문을 던지는 아이의 당당함이 부러웠다.

아이들이 행복하게 자랄 수 있도록

코로나19가 우리를 찾아왔다. 우리가 환영하고 초대한 것도 아닌데, 우리를 찾아왔다. 여기 저기 아동학대 소식도 더 많이 들리고, 아이들이 아프다는 이야기도 언론을 통해서도 듣고, 실제 어린이집에 재직하고 있던 교사 아이도 아파 교사가 사직했다.

25년 유아교육현장을 지켜왔다. 우리의 교육이 동양과 서양 어디에서 출발해서 어디서 어디까지가 동양의 교육이고, 어디서 어디까지가 서양의 교육이고, 그리고 무엇이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교육인지 나는 명확히 알지 못한다.

우리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찾아온 코로나19로 교육을 다시 돌아보아야 한다. 앞으로 더 위험한 감염병이 오더라도 아이들은 언제나 학교를 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인적환경과 물리적환경을 재구성해야 한다.

교실크기에 생활방역이 가능한 인원으로 학생수가 정해져야 하고, 아이들의 발달에 합당한 신체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되어야 한다. 주위 있는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어느 곳도 아이들에게 행복한 공간이라는 것에 동의되는 공간을 찾아보지 못했다. 학교에서 하는 특성화수업도, 학교 마다 차이를 드러내는 곳을 보지 못했다.

한국교육은 늘 틀리고, 유럽교육은 늘 옳은지를 맞다, 아니다 라고 대답을 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지금 알 수 있는 것은 아이들의 여러 성장환경이 불안전하고, 아이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덴마크에 다녀온지 5년이나 지나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우리교육의 현재는 변화되어야 하는 것들이 있고, 그 변화의 방향은 아이들이 안전하고 행복하게 자랄 수 있는 환경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육이 변하기 위해, 교사도, 학교도, 부모도 정책도 어느 것 하나 우선순위를 줄 수 없고 다 같이 변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교사이기에 교사들이 먼저 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꿈틀비행기6호에 함께 교육기관을 방문했던 정책을 만드는 사람들, 교사, 부모, 학생이 있었다. 그때도 두가지 이상의 역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5년이 지난 지금은 더 많아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주된 역할에서 꿈틀거리고, 또 다른 영역과 연대하고 연대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교육을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왜? 우리는 아이들이 행복하게 자랄 수 있도록, 그 일을 함께 하겠다고 다짐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변화의 과정에 함께 꿈틀거려야 하고, 그 변화를 위해 우리의 현재 교육이 갖고 있는 모순을 정확하게 보려는 눈을 가지고, 변화하기 위해 스스로 공부하고, 실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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