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이제 우리에게도 '환대의 병원'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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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에게도 '환대의 병원'이 필요하다

차갑고 무심한 한국 병원들... 부천에서 만난 '새로운 병원'을 꿈꾸는 사람들

 

사람이라면 누구나 생애 초기와 생애 후기 반드시 누군가의 돌봄에 의존해야 하며, 그 외의 시기에도 우리에게는 언제든 약해지는 순간이 찾아올 수 있다. 그로 인해 타인의 손길이 필요한 시간은 짧을 수도 있고, 생각보다 길어질 수도 있는데, 지금 우리에게 그것은 공포의 대상이다. 돌봄을 돈을 주고 사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65세가 넘도록 자기 집 한 칸 가져본 적 없는 나의 엄마는 몇 년째 입주 요양보호사와 간병인으로 남의 집에서 살면서 당신에게 돌봄의 필요가 닥칠 때를 대비해 돈을 모으고 있다. '자식에게 짐 되기 싫어서'라지만, 그건 노년의 부모를 돌보는 일이 결국 자식 몫으로, 돈의 문제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 '돌봄'이라는 것을 돈으로 사고 팔게 내버려 둘 것이 아니라, 필요한 누구에게나 돌봄이 제공되도록 공동체, 사회, 국가가 지원해줘야 한다고 목소리 내고 요구해야 한다고 믿는다.  

 





돌봄의 보람과 짐을 함께 나누는 '보편적 돌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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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에 출간된 <돌봄선언>(더 케어 컬렉티브 지음)은 이를 위해 우선 친족 개념을 확장하고 돌봄의 범위를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돌봄의 책임이 개별 가정에 돌아가는 것으로 귀결되지 않도록, 이른바 '대안 친족 구조'를 만들고 돌봄의 개념을 재정의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책에서는 미국 흑인 여성 공동체의 '공동 육아'(소셜 마더링), 그리고 1차 돌봄 제공자가 가족이 아닌 경우를 일컫는 '선택 가족'을 예로 든다. 하지만 이런 대안 친족 구조는, 개인의 관계망에 달려 있다는 점에서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구조는 아니다. 특히 요즘 같은 상황에서는 공동 육아나 돌봄 공동체 역시 개개인의 각자도생 속에서 생겨난 필사적인 몸부림에 가깝다.



이에 이 책은 "돌봄을 중심에 놓는 정치"가 시급하다고, "보편적 돌봄"이 필요하다고 선언한다. 이때 보편적 돌봄이란 차별 없고 경계와 제약이 없는, 서로가 거미줄처럼 엮인 그물망 같은 돌봄을 뜻하며 "모든 종류의 돌봄에 대해 모두가 공동의 책임을 지는" 것을 말한다(p. 55). 보편적 돌봄의 목표는 사회 전체가 돌봄의 보람과 짐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p. 42). 이런 식의 차별 없는 보편적 돌봄이 가능하려면 '돌보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때 돌보는 공동체를 만든다는 것은 개인의 관계망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영리를 위해 만들어지거나 전유되지 않고 공유되고 상호협동으로 만들어지는 공공 공간을 늘려가는 것을 의미한다"(p. 99).

 





공유와 협동으로 만들어지는 환대의 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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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원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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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상상하는 '공공병원'이 바로 이런 공간이다. "영리를 위해 만들어지거나 전유되지 않고, 공유되고 상호협동으로 만들어지는 공공 공간". 세계 어느 곳보다도 의료 공공성이 취약한 나라로 알려진 미국이지만, 내가 겪은 미국의 아동전문병원은 그야말로 환대의 공간이었다. 선천성 희소질환을 안고 태어난 내 아이의 첫 5년을 성심껏 돌봐준 미국 인디애나 주 소재 라일리 아동병원(Riley Children's Hospital)은 1921년 그 지역 출신의 시인 제임스 윗컴 라일리(James Whitcomb Riley)를 기리며 세워진 비영리(non-profit) 병원으로, 인디애나 대학교 의과대학과 연계되어 있다. 출산 후 이틀만에 아이와 함께 그곳 신생아집중치료실(NICU)로 옮겨졌을 때, 우리 부부가 무너지지 않고 몸과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 곳의 따뜻한 분위기와 의료진, 직원들의 적극적인 도움 덕이었다. 



병원이 '환대의 공간'일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갓 태어난 아이를 MRI실로, 초음파실로 들여보내고, '클리펠-트레노네이 증후군(Klippel-Trenaunay Syndrome)'이라는 낯선 병명을 받아 들고 미친듯이 검색을 해대던 그 겨울 밤에, 병원은 외국인인 나에게 따뜻한 안식처가 되어주었다. 병원 내 사회복지사는 우리의 형편을 알아보고 아이의 병원비를 지원받는 데 필요한 행정처리를 빠르게 해주었다. 저녁 때가 되면 그 지역 단체들이 돌아가며 따뜻한 식사를 제공해주었는데, 그 때 먹은 따끈한 그레이비를 끼얹은 매쉬드 포테이토와 비스킷 같은 음식들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게 '소울 푸드'로 기억되고 있다.

 





그런 병원을 여기서도 만나고 싶다



귀국 후 아이를 데리고 다녀본 한국의 많은 병원은 차갑고 사무적이며 무심하고 바빴다. 아이의 선천성 질환은 특별한 이유 없이도 고열과 극심한 통증을 일으키곤 하는데, 거기엔 항생제 열흘 처방 밖에는 방법이 없다. 동네 소아과 의사들은 의대 시절 교과서에서나 스쳐가듯 보았을 아이의 병명을 듣고 손사래를 치며 무조건 '다니던 상급병원으로 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상급병원엘 가도 어차피 항생제 처방밖에 방법이 없는데 대기시간만 길어져 아이가 고생한다고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고열로 시내 2차병원 응급실에 갔을 때는 아이의 증상과 대처방법을 읊는 내게 "(당신이) 의사냐?"며 힐난하고 (나보다 이 질환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하는) 남편을 향해서만 말하는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응급의학과 당직 의사와 멱살잡이를 할 뻔했다.



그렇게 돌고 돌아 만난 곳이 부천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에서 운영하는 부천 시민의원이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새로운 병원'을 꿈꾸는 사람들을 만났다. 올해 부천에는 '부천시 공공병원설립시민추진위원회'가 만들어졌고, 그 덕분에 공공의료 관련 책을 읽고, 회의를 하고, 강연을 들으며 내가 꿈꾸는 새로운 병원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 과정에서 정리된, 내가 원하는 병원의 모습은 다음과 같았다.

 





믿을 수 있고 여유 있는, 친절한 의료진이 있는 곳.
그래서 사람들이 마음 편히 찾아와 자기돌봄을 실현할 수 있는 곳.
돌봄의 가치를 인정하고 돌봄을 중심으로 병원 운영 철학을 세워나가는 곳.
돌봄제공자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는 시스템을 갖춘 곳.
환자와 가족의 마음까지 다독여주는 따뜻한 곳.
환자와 보호자들에게 행정적으로, 심리적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는 병원 내 사회복지사가 상주하는 곳.
어려운 질환으로 힘겨운 아이들에게 '무섭고 차가운 곳'이 아니라 재미있고 달콤한 향기가 나는 곳이 되어주는 환대의 장소.

 





'공공병원'이라는 낡고 진부하고 아무도 관심 가지지 않는 이름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이 '새로운 병원'을 어떻게 하면 현실로 이루어 낼 수 있을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공유와 상호협동으로 만들어지는 공공 공간"이 '돌보는 공동체'라고 했을 때, 그런 철학과 실천으로 만들어낼 수만 있다면 병원 역시 하나의 돌보는 공동체가 될 수 있으리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밑그림을 그리는 데, 선천성 희소질환이라는 평생의 숙제를 안고 태어난 한 아이의 엄마라는 나의 정체성이 큰 도움이 되고 있다. 환대의 병원을 만나본 경험이 있으니, 그 경험과 지금의 생각들이 잘 뭉쳐지면 이 일을 해낼 수 있지 않을까. 2023년에는 조금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공공병원'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오마이뉴스 | 서이슬 정치하는엄마들 활동가] 전문 보기
http://omn.kr/21y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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