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다] ‘아이를 불편해하는 사회’에서 아이 돌봄

‘아이를 불편해하는 사회’에서 아이 돌봄

[사회적 소수자와 돌봄] 모든 사람이 모든 아이를 돌본다면

 

※ 코로나19 팬데믹은 우리 사회가 돌봄에 얼마나 취약한지 여실히 드러내었고, 서로 돌보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습니다. 돌봄 사회를 위하여,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돌봄 현장을 조명하고, 다양한 돌봄의 경험과 아이디어를 나누고자 합니다.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언제부터 아이 돌봄이 엄마만의 역할이었나

 

매년 출생아 수 급감은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올해 6월에 태어난 아기는 18,830명(통계청, 인구동향조사, 2022)으로 전년 대비 -12.4%를 기록했다. 앞으로 태어날 아이는 더 줄어들 전망이다. 출생아 수 감소가 ‘생물학적인 재난’이며 ‘사회적 재난’으로 이어진다고 호들갑을 떨면서 보육과 출생 관련한 정책을 내놓고 있지만,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지는 의문이다. 아이를 돌보는 데에는 금전으로 채울 수 없는 부분이 더 많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임산부 배지를 가방에 달고부터 임신, 출산, 육아에 대한 막대한 정보가 어깨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엄마라는 부담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산부인과 전문의 시험을 준비하듯 임신과 출산에 대해 공부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임신 중 해서는 안 되는 것들과 주 수에 맞게 해야 하는 일들을 빠짐없이 챙겨가며 맞이한 출산 후의 삶은, 그러나 책에서 본 내용과는 차원이 달랐다.

 

▲ 어린이 대공원 서울상상나라에서 주관하는 상설전시 중 다양한 직업의 세계를 탐구하는 문화놀이 부분에 있는 주부에 대한 설명. 그림자 노동까지 포함하면 주부의 하루 일과를 이 전시 내에 다 담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은선

 

아이를 낳고 양육하는 과정이 여성에게 생물학적으로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말은 거짓이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여성에게 주어진 임무의 상당 부분은 산업화 세상에서 부과된 새로운 임무였다. 엘리자베트 벡 게른스하임이 쓴 『모성애의 발명』에 따르면, 산업사회 이전 육아는 먹고 입는 것처럼 어린아이의 기초적인 욕구와 관련된 일이 전부였다. 모든 것은 따로 비용을 들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집안일과 함께 진행되었다고 한다. 아이를 돌보는 노동은 여러 사람이 나누어 맡는 것이 전형적이었다. 게다가 육아를 담당할 인원이 대체로 충분했다.

 

근대로 이행하면서 부르주아적 역할 모델로 어머니의 역할이 신격화되기 시작했다. 비로소 19세기에 이르러 어머니라는 존재가 폭넓게 이상화되고 낭만적으로 고양되었다. 그 약발이 한 세기도 채 머무르지 못하고 19세기 말부터 출생률 저하가 시작되어, 2차 출생률 저하 시기(산업화 발달 시기, 저자의 주 연구 대상인 독일 사회는 1965년부터)를 거쳐 지금까지 꾸준히 출생률은 낮아지고 있다.

 

산업사회에서 노동자의 노동력이 풀가동될 수 있도록, 여성에게는 가정에서 타인을 돌보는 일이 맡겨졌다. 즉, 자유로운 인력 수급과 착취를 위해 모두가 함께하던 임무를 대다수의 여성이 홀로 책임져야 했다. 여성은 타인을 위한 존재가 되어 가정이라는 오아시스를 지킨다. 이 역사는 한국에서는 ‘독박육아’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맞벌이 양육자 둘이서 해결할 수 없는 돌봄 공백

 

맞벌이 가정의 경우에 아이 돌봄 문제는 딜레마의 연속이다. 출근 시간에 쫓겨 이른 시간에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시간연장반을 신청해 퇴근 시간까지 어린이집에 있던 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오면 밀린 집안일이 기다리고 있다. 빨래도 개야 하고, 저녁 준비를 하면서 설거지와 청소를 하는 건 기본이다. 온종일 고팠던 아이 마음을 달래주며 저녁을 먹이고 씻기고 나면 하루가 간다.

 

갑자기 아이가 아파 열이라도 나면 어린이집에 보낼 수도 없다. ‘가족 돌봄 휴가’ 제도라는 것이 있지만 적용되는 사업장은 귀하고, 만약 있더라도 회사의 눈치 보지 않고 돌봄 휴가를 마음 편히 쓸 수 있는 사업장은 매우 드물다. (코로나19 팬데믹처럼 공적 돌봄이 마비된 상황에서는 열 번 주어지는 가족 돌봄 휴가 횟수도 턱없이 미비하다.)

 

돌봄 공백을 해결하려면 양가 부모님의 도움을 받거나 등하원 도우미를 고용하지 않고는 도저히 양육자 둘이서 문제를 풀어낼 수가 없다. 혼자서 생계부양자와 양육자의 역할을 겸해야 하는 한부모 가정의 경우, 아이 돌봄 문제는 종종 피가 마르는 상황으로 치닫게 된다.

 

▲ 일상적인 초등학교 하교 모습. 학부모들과 각종 학원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맞이하고 있다. ⓒ오은선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면 돌봄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초등학교는 일반적으로 오후 1시 전후에 하교한다. 어린이집처럼 시간연장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운이 좋아 돌봄 교실에 들어가더라도 오후 5시까지 운영하는 돌봄 교실은 양육자의 퇴근 시간까지의 공백을 전부 채워주지 못한다. 결국 그 공백은 태권도 학원과 피아노 학원, 미술 학원 선생님들이 채워준다. 그래서 아이가 초등 1학년일 때 양육자는 퇴사를 진지하게 고려하게 된다. 퇴사를 선택하는 사람은 주로 엄마라는 역을 맡은 여성이다. (참고로, 전국 최초로 서울시교육청이 내년 3월부터 초등 돌봄 시간을 오후 8시까지 확대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동안 돌봄 교실 개선 방안에 대한 논의 결과가 반영된 결과다.)

 

 


유아차를 끌고 아이와 함께 외출하기

 

아이가 보육기관이나 교육기관에 가지 않을 때는 어떻게 시간을 보낼까. 집 근처 통원할 수 있는 거리에 아이를 맡길만한 적당한 어린이집이 없는 경우라면? 어린이집에 맡기기에도 너무 어린 영아라면? (다수의 육아서에서는 아이와 엄마와의 안정 애착을 위해 생후 6개월은 엄마가 돌보는 것이 좋고, 적어도 생후 18개월까지는 가정에서 엄마가 돌보기를 권한다. 만3세까지 가정 돌봄을 권장하는 책들도 있다. 사정이 여의찮아 기관에 일찍 보내게 되면 그놈의 ‘안정 애착’이라는 말이 양육자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가정 내에서 돌봄은 언제나 한계가 존재한다. 종일 책상에 앉아 사부작거리는 놀이를 즐길 수 있는 끈기 있는 어린이는 드물다. 집에서의 놀이가 지겨워져 몸이 근질근질해지기 전에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야 한다.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지면 ‘층간소음’으로 이웃에 피해를 주는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다.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빨간 날이면 무조건 아이를 데리고 나간다.

 

아이를 데리고 갈 곳을 정하는 것도 고심해서 선정한다. 아이와 함께 나들이하기 좋은 곳을 찾기 위해 지역 카페에 물어보기도 하고, 인터넷 검색도 철저히 한다. 사진만 보고 좋아 보여서 그냥 출발했다가는 ‘노키즈존’(No kids zone)이라는 복병을 만날지 모른다. 국가인권위원회는 13세 이하 아동의 이용을 일률적으로 제한하는 것은 합리적 이유가 없는 명백한 차별행위라고 판단했지만, ‘노키즈존’은 여전히 곳곳에 존재한다.

 

아예 ‘엄마의 지도’나 ‘애기야 가자’ 앱으로 ‘웰컴키즈존’을 찾아 아이와 함께 할 곳을 고른다. 선택지가 다양해 보여도 아이를 환영하지 않는 곳, 평일에 자주 가서 아이가 식상해할 곳을 제외하고 거리와 운영 시간을 고려하다 보면 갈 곳이 그리 많지 않다.

 

신중하게 고르고 골라 행선지를 정했다. 이제 출발인 듯싶지만, 준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이가 없을 때는 지갑과 핸드폰만 챙기면 끝이었지만, 아이와 함께하는 외출은 만반의 준비가 필요하다. 아이와 외출 시 마실 물, 간식, 여벌 옷, 지루해할 때 잠깐 시선을 끌어줄 스티커 북, 무언가를 흘렸을 때 닦을 면손수건(영아 시기에는 물티슈를 사용했지만,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려고 손수건으로 바꿨다)은 기본 준비물이다. 여름이면 모자, 모기 기피제, 휴대용 선풍기, 유아용 자외선 차단제를 추가로 챙긴다. 아기일 때는 기저귀와 분유병, 분유를 제조할 뜨거운 물을 담은 텀블러, 이유식까지 준비해야 하므로 수납력 좋은 기저귀 가방이 필요하다.

 

▲ 29년 만에 설치된 아파트 내 경사로. 경사로 하나 설치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을까. ⓒ오은선

 

자동차를 이용하는 가정은 카시트를 미리 장착해 놓는다. 트렁크에 아이를 위한 온갖 상비 용품들이 가득한 모습은 익숙한 풍경이다. 뚜벅이 양육자인 나는 유아차에 온갖 짐을 다 싣고 외출에 나선다. 휴대용 유아차는 아이가 타지 않아도 이미 묵직하다. 이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접이식 휴대용 유아차를 준비했지만, 유아차를 이용한 이동은 생각만큼 만만하지 않다.

 

바로 길가에 즐비한 턱 때문이다. 유아차가 없을 때는 높이라고 인식하지 못했던 턱이 이토록 이동을 힘겹게 만드는지 알지 못했다. 무지했던 자신을 반성하면서, 휠체어를 타고 이동하는 사람들의 외출을 떠올렸다. 100kg이 넘는 전동휠체어의 경우에 턱이 있는 길은 불편함 정도가 아니라 가지 못할 길이 된다. 유아차를 끄는 나는 뒷바퀴에 힘을 싣고 앞바퀴를 살짝 들어 올려 턱을 통과하는 기술을 익혔다. 그마저도 엘리베이터가 없거나 경사로가 설치되지 않은 건물 안은 물리적으로 입장이 불가능하다.

 

버스나 지하철에 탑승해야 이동이 가능한 거리라면 외출은 더 난감해진다. 전국 저상버스 보급률이 30.6%밖에 되지 않는 상황에서, 운이 좋아 저상버스를 만난다고 해도 유아차를 안전하게 실을 때까지 기다려주는 버스는 없다. 조금이라도 꾸물거리면 승객들이 불편해하기 때문에 빨리하라고 채근당하기 십상이다. ‘우리는 승객이 아니냐’고 되묻고 싶지만, 마음속으로 꾹꾹 눌러 담는다.

 

버스를 포기하고 지하철을 선택하더라도 열차 탑승까지의 길은 멀기만 하다. ‘또타지하철’로 교통약자 이동 경로 정보를 확인하고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출구로 찾아간다. 지하철 개표구까지 한 번, 탑승구까지 두 번의 엘리베이터를 환승하면 20~30분은 금방 지나간다. 승강기가 설치되어 있지 않은 지하철역은 계단 이동을 위해 지하철 승무원의 도움을 받게 되어 있다. 그러나 아직 승무원의 도움을 받아본 적이 없다. 성인 두 명 이상이 있을 때는 승객이 알아서 해결하는 것이 원칙이고, 아이와 단둘이 외출했을 때에는 지나가던 승객이 나서서 이동을 도와주었다. 덕분에 한 팔에 아이를 안거나 업고, 다른 팔로는 유모차를 밀며 꿋꿋이 탑승한다.

 

 


아이와 양육자는 왜 혐오의 대상이 되었나?

 

잠 못 드는 나날들로, 커피 수혈 없이는 하루도 버티기 힘들다. 그런데, 커피를 마시며 유아차를 끌고 가는 내 모습은 어떻게 보일까? 생계 부양을 맡은 양육자를 일터로 보내고 한가롭게 커피나 마시며 노는 아줌마로 보는 시선을 받기 일쑤다. 전업주부는 경제력이 없다는 생각 때문에 육아와 아이 돌봄 노동의 가치가 폄하되어 온 것이 현실이다. (주부의 경우 노동 시간을 월급으로 환산하면 432만9천 원이 된다고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서 발표한 바 있다. 2008년 기준) 그림자 노동을 지속하며 육아와 아이 돌봄을 전담하지만, 통장에 쌓이는 노동이 아니라는 이유로 경제적 가치가 없다고 인식한다. 이런 시각은 양육 노동을 더 힘들게 만든다.

 

양육자를 힘들게 만드는 것은 또 있다. 대체 우리 사회에서 아이는 어쩌다 불편한 존재가 되었을까? 아이의 특성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실수를 통해 배운다. 서투르더라도 계속한다. 자유롭다. 에너지가 넘친다. 자유롭다. 제멋대로다. 통제가 안 된다. 같은 상황에서도 아이를 바라보는 시각은 양극단의 긍정과 부정의 시각으로 나뉜다. 중요한 점은 아이의 모든 특성은 발달 단계에 따라 자연스러운 과정을 통해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어른처럼 얌전히 있지 못한다고, 음식을 흘리고 먹는다고, 아이를 죄인으로 만들고는 한다. 아이는 죄가 없다. 성장하고 있을 뿐이다. 아이를 사회와 분리하고, 위험하고 불손한 존재로 보는 시각이 나쁜 것이다.

 

▲ 승강기가 없는 지하철을 이동하는 양육자 ⓒ오은선

 

오늘도 꾸역꾸역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와 에너지를 쏟는 활동을 한다. 아이에게 적대적인 사회는 양육자에게도 적대적이다. 오늘날 ‘평범한’ 생활 세계는 아이에게 (어른들의 고상한 취향을 따르기에) 그다지 적합하지 않다. 세상은 아이를 거슬리는 존재로 만들어서 사회와 자꾸 분리하려 든다. 장애인을 시설에 가두듯이 아이들을 아이들만의 공간에만 있으라고 한다. 우리는 모두 사회의 일부분인데. 더 이상 격리되어 분리된 사회에서 살고 싶지 않다.

 

‘노키즈존’이라며 아이를 배제하고자 하더니, 이제는 ‘노배드패런츠존’(No bad parents zone, 나쁜 부모 출입 금지) 혹은 ‘케어키즈존’(Care Kids Zone, 문제가 생기면 보호자 책임이라고 경고)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어린이와 양육자를 함께 내몰고 있다. 아이를 신경 쓰지 않고 내버려 두려는 양육자는 없다. 차별과 혐오는 습자지에 물들 듯 빠르게 스며든다.

 

지난 5월, 국회 앞에서 아동·청소년 인권 단체들과 마음을 함께하는 어른들이 ‘어린이 차별 철폐의 날’을 선포했다. 우리는 방정환 선생이 어린이날을 제정한 지 100년이나 지났지만, 어린이들을 향한 차별과 혐오는 그대로라는 것. ‘노키즈존’이 유엔아동권리협약을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유엔아동권리협약에는 반드시 기억해야 할 4가지 일반 원칙이 있다. 비차별의 원칙(제2조. 아동은 모든 종류의 차별로부터 보호받으며, 부당한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된다), 아동 최상이익원칙 (제3조. 아동에 관한 모든 결정에 있어 아동의 최상의 이익이 우선되어야 한다), 생명과 생존 및 발달의 원칙(제6조. 아동은 생명에 대한 고유한 권리가 있으며, 국가는 아동의 생존과 발달을 보장해야 한다), 의견 존중과 참여의 원칙(제12조. 아동은 자신들과 관련된 문제 상황에 대해 의견을 표현할 권리가 있으며, 아동의 의견은 존중되고 진지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아동 권리 실현은 양육자만의 책임이 아니라 국가를 포함하여 가족, 아동, 교사, 지역사회, 지방정부 등 모든 사회 주체에 그 책임이 있다. 다시 강조하면 우리 모두가 책임져야 한다.

 

 


서로 돌보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다

 

모든 사람이 내 아이를 돌보듯이 모든 아이를 함께 돌본다면, 육아와 아이 돌봄의 무게가 한결 가벼워질 것이다. 저출생의 원인은 다양하지만, 이 부담을 줄이기 위한 방법은 ‘함께 돌봄 정책’이 우선이다. 각종 돌봄비 지원, 교육비 부담 완화 정책, 대학 등록금 지원 등 모두 돈으로 해결하려고 하지만, 과연 돈이 모든 돌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육아와 아이 돌봄은 여러 사람이 나누어 맡는 것이 전형적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돌봄은 누군가가 혼자 해서도 안 되고 할 수도 없다. 아이 역시 혼자 키울 수 없고, 혼자 키우는 게 아니다. 오롯이 혼자 크는 아이는 어디에도 없다.

 

돌봄을 함께 하려는 노력이 더해진다면, 육아와 아이 돌봄으로 다른 삶을 상상하기도 어려웠던 많은 여성들에게도 기회의 문이 열릴 것이다. 출산과 모유 수유만 빼면, 육아와 아이 돌봄은 누구나 할 수 있고 또 함께해야 하는 일이다.

 

출산 장려금이나 자녀수당, 정부 보조금을 올리는 것은 자녀를 더 많이 가지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데 그다지 결정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보다는 ‘동반자 관계’에 기반을 두고 가족을 구성할 수 있도록 장려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다. 성평등, 여성해방, 젠더 관계의 변화를 인식하고, 열린 가족 정책을 펴는 것이 ‘함께 돌봄’으로 갈 수 있는 디딤돌이 될 수 있다.

 

팬데믹 상황에서 돌봄의 중요함이 크게 부각되었다. 돌봄이 생존과 긴밀히 연결된 활동이라는 점이 명확해졌지만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손을 내밀기도 어려운 시대가 되어버렸다. 우리는 누구나 아이였고, 아플 수도 있고, 나이가 든다. 생애 어느 주기에서든 돌봄이 필요한 순간은 언제나 찾아온다. 서로를 돌보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다.

 

 


[필자 소개] 오은선. 정치하는엄마들. 어린이가 행복한 세상에 희망이 있다고 믿는 활동가, 작가, 살림 노동자. 한집에 사는 5세 어린이와 초등 1학년, 4학년 조카까지 어린이 셋의 돌봄을 담당하고 있다.

 

🟣[일다 | 기고 오은선 활동가] 기고 전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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