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경향][오늘을 생각한다] 나의 돌봄노동은 가치가 있는가

[오늘을 생각한다]나의 돌봄노동은 가치가 있는가

저녁 아홉시 넘어 제주에 사는 이모한테 전화가 왔다. 받자마자 “하나야!” 하고 울부짖는 것이었다. 순간 “이~모!” 하고 외치며 눈물이 터져 나왔다. 엄마한테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지금, 이 순간 엄마가 나와 같은 세상에 계신지 아닌지도 모르는 그 찰나, 엄마 소식이 궁금하면서도 이어지는 말을 듣기가 무서워 시간을 멈추고 싶었다. 시간을 멈출 수 없기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유월 초 어느 날 밤의 일이다.
 

다음날 첫 비행기를 타고 고향에 와 두달 넘게 지내고 있다. 뇌동맥류 파열이라는 사망률 높은 질환에 굴하지 않고 엄마는 지금 내 곁에 있다. 크나큰 행운이다. 엄마가 중환자실에 계셨던 2주 동안은 혹시 안 좋은 소식이 들려올까 전화가 울릴 때마다 깜짝깜짝 놀랐다. 바퀴벌레 다음으로 싫은 엄마 잔소리를 한 번만 더 듣고 싶다고 바다에 빌었다. 7주 만에 엄마가 집으로 돌아오셨다.

홀어머니에 외딸, 우리 가족은 참으로 단출했다. 내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 엄마에게는 나, 나에게는 엄마가 온 세상과 같았다. 내 나이 일곱 살, 우리 엄마 서른일곱에 엄마는 가진 것 하나 없이 혼자 힘으로 나를 키우겠다 결심하셨다. 엄마는 일평생 가족을 위해 헌신하면 살아오셨고, 그 최대수혜자가 바로 나였다. 나는 그런 엄마가 늘 고마웠지만,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일찌감치 다짐하기도 했다. 엄마라는 이유로 등골 빠지게 일하는 모습이 대신 억울했다.

아마 내가 ‘엄마’를 소수자로 규정하고 ‘엄마’의 정치세력화를 제안한 데는 우리 엄마를 위한 억울함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효도와는 거리가 멀다. 스스로 불효의 아이콘이라고 느낀다. 엄마의 하나뿐인 딸이라는 이유로 하고 싶은 일을 참거나 양보한 적이 딱 한 번 빼고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으리라, 한 번뿐인 인생을 누굴 위해 희생하지 않으리라 각오가 단단했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보다 외로운 엄마를 더욱더 외롭게 만들었다.

이제 엄마 곁에는 내가 24시간 있어야 한다. 일곱 살 딸과 오래 떨어져 지내다 보니 내 마음이 너무 황폐해져 결국 남편과 딸도 제주로 왔다. 지난 25년 동안 혼자 살던 엄마가 이제는 복작복작 네식구랑 산다. 엄마는 가게에서 쓰러졌는데 다시 일하시기는 어렵다. 남편도 급한 대로 휴직을 했지만, 복직이 쉽지 않다. 나는 근무시간을 절반으로 줄여 재택근무를 이어가고 있는데, 이 벌이로는 부족하다. 한숨 돌리고 나면 돌봄의 정치를 말할 수 있을까?

딸이 일곱 살이 되자 혼자 머리도 감는다. 자기 입으로 다 컸다고 말하기도 한다. 딸은 어느새 돌봄이 필요 없는 사람이 돼가고 있다. 이제 나는 엄마 머리를 감겨 드려야 하고, 어딜 가든 엄마 손을 잡고 다닌다. 그렇게 매일매일 부지런하게 일하고 있는데 나의 돌봄노동에는 가치가 없다. 엄마를 잘 돌보고 싶은데 이런 생활은 지속가능성이 없다. 돈이 떨어지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그래서 정치를 했던 건데 요즘은 정치할 짬도 없다.

<장하나 정치하는엄마들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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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24&artid=202108131457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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