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정인이들' 위한 정치적 결단 해야 할 때다

프로젝트

‘정인이들’ 위한 정치적 결단 해야 할 때다

 

[토요판] 기획
예견된 비극, 아동학대

‘사랑의 매’라고 포장한 폭력
63년 만에 ‘친권자 징계권’ 삭제
처벌·분리·가해자 신상공개 답일까

생존자 삶의 질 고려 없는 대책 급조
살아남은 정인이들은 ‘문제아’ 취급
문제의 해법은 아무도 모르는 상태

영국 2년간 ‘클림비 보고서’ 작성
4년9개월 만에 아동보호체계 개혁
아동돌봄 국가책임 분명히 해야

10일 오후 서울 양천구 서울남부지검 앞에 놓인 추모 화환. 검찰은 16개월 영아 정인이를 학대해 숨지게 한 양모 장아무개씨를 아동학대치사 혐의로 구속기소한 바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 정인이를 잃고 한국 사회는 깊은 죄책감과 분노에 빠졌다. 정부와 정치권은 부랴부랴 대책을 내놓고 제도를 손질했다. 그러나 분노가 부족해서, 내놓은 대책이 없어서 수많은 ‘정인이들’이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번에도 또 그렇게 넘어간다면 우리는 또다시 정인이를 잃을 것이고, 학대당하는 아이들의 미래는 계속 비참할 것이다. 아동학대 문제를 고민하고 개입해온 ‘정치하는엄마들’ 활동가 장하나 전 의원의 글을 싣는다.

정인아 미안해. 우리가 미안하다고 말해야 할 이름은 결코 하나가 아니다. 지난 2일 에스비에스(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양천 입양아동 학대 사망사건을 보도한 이후, 세상이 정인이를 부르짖고 있지만 그것은 한 아이의 이름이 아니다. 그렇게 죽어선 안 될 이름들, 살릴 수 있었던 이름들, 그러나 알려지지 않은 모든 이름들을 우리는 목놓아 부르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임시국회 마지막날이던 지난 8일, 국회는 친권자의 징계권을 규정한 민법 제915조를 1958년 민법 제정 후 63년 만에 삭제했다. 우리는 자신의 이름과 생전 모습까지 다 내어주고 떠난 16개월 정인이에게 큰 빚을 지고 말았다. 그러나 방송 일주일 만에 아동학대 관련 법안 23건을 쏟아내는 국회, 종합대책을 더 빨리 내놓으려 경쟁하는 여야의 모습에서 참을 수 없는 정치의 가벼움을 재확인한다.

처벌을 강화하면, 가해자 신상을 공개하면, 2회 신고 시 즉시 분리하면, 법원에 쇄도한 진정서대로 살인죄를 적용하면, 우리는 정인이를 살릴 수 있을까? 정인이에게 진 빚을 갚을 수 있을까?
 

급조된 대책…우리는 ‘정인이들’을 지켜낼 수 있나

2020년 6월 천안, 초등학교 3학년 정인이는 가로 44㎝, 세로 60㎝, 너비 23㎝ 크기의 여행가방 안에서 13시간 이상 감금·구타당한 끝에 사망했다. 그 아이도 살릴 수 있었다. 그해 5월5일 정인이는 머리에 약 2.5㎝ 열상을 입고 병원 응급실을 찾았고, 온몸의 멍 자국을 의심한 병원 측이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친부와 계모로부터 지속적인 학대 사실에 대해 자백받았지만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가해자들의 말만 믿고 아이를 구조하지 않았다. 검찰은 계모에게 살인 등 혐의로 무기징역을 구형했고, 9월16일 1심 법원은 징역 22년을 선고했다.

그리고 10월13일 양천 사건이 벌어졌다. 법원이 22년 대신 종신형을 선고했다면, 계모의 신상을 공개했다면, 양천 사건을 막을 수 있었을까? 법으로 정한 신상공개는 아니었지만 에스엔에스(SNS)상에서 계모와 그 친자녀 두 명의 신상이 공공연히 유포되었다. 하지만 ‘대중에 의한 단죄’ 그 이상의 의미나 범죄 예방 효과는 없었다.
 

생후 16개월 만에 양부모의 학대로 숨진 정인이가 안치된 경기도 양평군 하이패밀리 안데르센 공원묘원에 4일 오후 시민들의 추모 메시지와 꽃, 인형 등이 놓여 있다. 양평/박종식 기자 [email protected]

2019년 9월 인천, 5살 정인이는 손발이 뒤로 묶여 몸이 활처럼 휜 상태로 계부의 목검으로 100여차례 구타당하고 24시간가량 방치된 끝에 사망했다. 작년 12월 서울고등법원은 계부에게 살인 등 죄목으로 원심보다 무거운 징역 25년을 선고했다. 인천의 정인이도 살 수 있었다. 계부는 이미 2017년 1월 아동학대로 기소되어 2018년 4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고, 정인이는 보육원에서 2년 이상 생활했지만 원가정 복귀 후 한 달도 안 돼서 집행유예 중인 계부에게 살해된 것이다. 인천의 정인이는 ‘분리’를 통해 2년 더 살았지만 정인이의 삶은 6년을 넘기지는 못했다.

양천 사건 직후, 지난해 11월 보건복지부와 경찰청은 ‘적극적인 분리 보호’ 대책을 발표했고 12월2일 관련 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아동학대처벌법 제12조에 따른 응급조치(72시간 이내) 제도가 있지만 현장의 소극적인 대처가 문제시되자 ‘2회 신고 시 응급조치 실시’ 규정을 신설하고, 또한 1년 이내 2회 신고 시 아동복지법 제15조에 따른 보호조치(가정위탁, 공동생활가정, 아동복지시설 입소 등)를 적극 시행하는 내용이다. 이렇게 법을 개정하면 마치 이전에는 법 제도가 미비해서 분리 보호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이 아니다. 현장 인력이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 문제에 대해 인력을 교체하거나 교육하는 대신 ‘2회 신고 시 분리’라는 엉뚱한 대책이 나왔다. 분리조치는 아이의 삶을 송두리째 흔드는 일이다. 이 문제를 이렇게 기계적으로, 전문성이 의심되는 현장 인력에게 맡기는 것 자체가 정부의 무관심, 무지를 드러내는 일이다. 그리고 2년 넘는 보육원 생활 끝에 원가정 복귀 후 사망한 인천의 5살 정인이에게 정부 대책은 아무런 답이 되지 못한다. 실로 무책임하다.

2020년 1월 여주, 계모는 언어장애가 있는 9살 정인이를 베란다 찬물 욕조에 장시간 방치하여 사망에 이르게 했다. 여주의 정인이는 2016년 두 차례의 아동학대 신고에 의해 무려 33개월 동안 원가정에서 분리 보호됐지만, 친부 요청으로 가정 복귀 후 사망했다.

2019년 1월 의정부, 4살 정인이는 바지에 소변을 봤다는 이유로 친모에게 구타당하고 화장실에 장시간 감금되어 사망했다. 정인이는 언니, 오빠와 함께 2018년 5월까지 1년간 아동보호시설에서 생활했지만 가정 복귀 후 1년도 안 돼 죽음에 이르렀다.

‘분리’를 대책으로 내세우려면 분리 이후의 전 과정을 살펴야 했다. 쉼터 이후의 삶에 대해서 과연 누가 고민을 했나? 누가 책임질 것인가? 양천의 16개월 정인이는 세 차례의 신고에도 가해자와 분리되지 않았고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런 질문은 어떤가? 만약 분리조치를 했다면 정인이는 살 수 있었을까?

‘2019년 아동보호전문기관 업무수행지침’에는 피해 아동에 대한 분리보호 시 ‘조속한 시일 내 아동이 안전한 원가정으로 복귀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고 명시돼 있다. 가정 복귀 시 업무 절차는 ‘아동의 가정 복귀 의사를 확인’해야 하는데 16개월 정인이의 의사 확인은 어렵고, 다음이 가정환경 조사인데 △보호자가 피해 아동의 양육을 원하는지 여부 △문제 원인을 해결하려는 노력 및 해소 여부 등 현장 인력의 판단이 절대적인 과정이다. 그리고 가정환경조사 서식에는 보호자의 거주 상태, 소득, 국민기초생활수급권 여부를 기재하도록 되어 있어서, 정인이의 양부모가 ‘반성한다, 양육을 원한다’고 말하면 가정으로 복귀됐을 확률이 매우 높다.

그래도 만약에 양천의 정인이가 살 수 있었다면, 잘 살 수 있었을까? 생존 자체도 중요하지만, 아동학대 생존자들의 삶의 질은 온전히 ‘살아남은 자의 몫’으로 떠넘기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현실이다. 작년 5월 경남 창녕에 사는 초등학교 4학년 정인이는 친모와 계부의 잔혹한 학대, 목에 채워진 쇠사슬과 불에 달군 젓가락으로부터 탈출했다. 창녕의 정인이는 지금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거리청소년의 자립을 지원하는 ‘움직이는청소년센터 엑시트’는 아동학대 생존자들과 일상적으로 조우한다. 엑시트의 윤경 활동가에게 ‘분리조치를 통해 양천의 정인이가 살 수 있었다면 어떤 삶을 살았을지’ 의견을 물었다. “잘 살아남았을 것이라 장담하기가 어렵습니다. 엑시트에서 만나는 학대 피해 생존자들은 학대 가해자로부터 탈출한 지 수년이 지나도 그리 잘 살고 있지 않습니다. 학대 판정을 받고 시설로 옮겨졌지만 그곳에서도 폭력적인 경험을 했거나, 시설이 아닌 거리로 나섰지만 거리 역시 만만찮기 때문입니다. 타인으로부터 존중받는 경험과 신뢰에 기반한 돌봄의 부재 그리고 신체적·심리적 폭력의 경험은 아주 오래도록 생존자들을 괴롭힙니다. 학대 초기에 학대를 멈출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한 대응 체계가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학대가 발생한다면 피해자에게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사회적 지원이 제공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살아남은 피해 아동이 정말 살아남을 수 있게 됩니다.” 우리 사회는 정작 살아남은 정인이들을 문제아·범죄자·낙오자 취급하고 있다. 그들에게서 정인이를 보아야 한다.
 

원본보기

16개월 영아 정인이를 학대해 숨지게 한 혐의를 받고 있는 양부모의 첫 재판을 이틀 앞둔 11일 오전 서울 양천구 서울남부지검 정문 인근에서 대한아동학대방지협회 관계자들이 화환의 리본을 고정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email protected]
 

클림비를 잃은 영국의 교훈

대중의 이목이 가해자 처벌에 집중될수록, 고장난 아동보호 체계의 문제는 은폐된다. 정치하는엄마들은 작년 8월 천안시장, 천안서북경찰서장, 충남아동보호전문기관장 등 관계기관장들을 아동복지법 위반, 직무유기 등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지만 책임자 처벌도 근본 대책은 아니다. 우리는 이 문제의 해법을 찾기 위해 엑시트, 민변 아동위원회, 국제아동인권센터 등 아동학대 문제를 천착해온 공익활동가들에게 물었다. 그리고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직면했다. ‘아무도 모른다.’ 아동학대 사건은 수없이 다룬 전문가들도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알 수 없다고 말한다.

2000년 2월 영국에서 9살 빅토리아 클림비가 친척의 지속된 학대로 사망했다. 그의 작은 주검에 밧줄로 묶고 담뱃불로 지져 생긴 128개의 상흔이 남아 있었고 영국 사회는 분노했다. 이에 영국 정부와 의회는 독립적인 법정 진상조사단을 구성해 2년간 380만파운드(약 56억원)를 투입해 400쪽 분량의 ‘클림비 보고서’를 작성한다. 2003년 1월 발간된 보고서는 약 270명의 증언을 바탕으로 클림비의 삶과 죽음을 밝히고, 재발 방지를 위한 108개의 정책 제언을 담았다. 같은 해 9월 재무장관은 클림비 보고서의 제언을 충실히 반영한 100쪽짜리 녹서(그린 페이퍼) <모든 아동은 중요하다>(Every Child Matters)를 의회에 제출했고, 2004년 11월 영국 의회는 녹서를 실현하기 위해 ‘2004년 아동법’(Children Act 2004)을 통과시켰다. 클림비의 죽음으로부터 4년9개월 만에 영국은 아동보호 체계를 대대적으로 개혁한다.

영국은 왜 클림비 보고서에 막대한 시간과 돈을 들였을까? 2000년의 영국도 답을 몰랐던 것이다. 대증적인 조치로는 아이들의 죽음을 막을 수 없다는 진실을 영국 정부는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클림비 보고서는 학술적 목적이 아니라, 마치 코로나19 백신처럼 철저히 실용적인 목적으로 ‘피해 아동을 살리기 위해’ 쓰였다. 지름길은 없다.

한국에서도 두 번의 진상조사가 있었다. 2013년 10월 발생한 울주 아동학대 사망사건 진상조사와 2016년 7월과 9월에 각각 발생한 대구·포천 입양아동 학대 사망사건 진상조사다. 국회의원과 시민단체, 학자, 변호사 등 전문가가 참여하는 민간조사위원회 형식이었다. 이 두 보고서는 한국판 클림비 보고서로 불렸지만 클림비 보고서처럼 현실 세계를 바꾸진 못했다. 대구·포천 사건 진상조사에 참여했던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공익법률센터 소라미 교수는 말한다. “양천 사건과 유사한 사건으로, 2016년 만 4살의 입양 아동이 입양된 지 7개월 만에 아동학대로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입양 제도와 학대 대응 체계 곳곳에서 발생한 누수가 누적된 결과였다. 민간의 힘으로 입양 절차와 학대 대응 시스템의 문제를 파악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진상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약 1년에 걸쳐 준비한 입양특례법 전부개정안을 국회에 제안했으나, 국회와 정부는 소극적으로 응대했다. 결국 법안은 20대 국회가 폐회되며 함께 자동 폐기되었다. 진상조사를 민간 차원에서 자체적으로 진행한 한계이다.” 2016년 7월 예비 양부의 학대로 이미 뇌사 상태에 빠진, 대구의 4살 정인이의 친권을 서울가정법원이 가해자에게 넘긴 있을 수 없는 사건이었지만, 입양특례법은 바뀌지 않았다.

지난 2일 양천 사건이 방송을 타고 정치권이 분주하다. 늘 같은 방식으로 대처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할 순 없다. ‘양천 아동학대 사망사건 진상조사 특별법’을 제안한다. 일주일 만에 만드는 말장난 같은 대책 말고, 전문가들에게 욕먹는 대책 말고, ‘정인이’들 앞에 떳떳한 대책을 만들자. 처벌, 분리, 시설보호…. 이런 것들은 단순히 생존을 위한 조치일 뿐, 생존자에겐 돌봄이 필요하다. 정인이를 구조한 다음엔 어쩔 셈인가? 정인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안전한 환경에서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는 공적 돌봄 체계를 만들려면 정치권의 결단이 필요하다.

돌봄은 말로 하는 게 아니다. 돌봄에는 돈, 시간, 신뢰가 필요하다. 이 문제의 본질은 ‘국가가 개입(분리)해서 살릴 수 있었다’가 아니라 ‘국가가 방임했다. 돌봄의 책임은 국가에 있다’는 것이다.

장하나 정치하는엄마들 활동가

출처: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8/0002528883?sid=102

날짜
종료 날짜

댓글 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