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EBS 어린이 프로, 엄마들이 ‘성평등’의 눈으로 뜯어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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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어린이 프로, 엄마들이 ‘성평등’의 눈으로 뜯어보다

노도현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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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상반기 EBS에서 방영한 유·아동 대상 프로그램.  EBS

2020년 상반기 EBS에서 방영한 유·아동 대상 프로그램. EBS

“어떤 말을 글자로 만들어볼까? 축구, 남자 친구들이 좋아하는 축구!”

지난해 4월 방영된 EBS <생방송 우리집 유치원> 속 문어 캐릭터의 대사다. 이를 본 남자아이는 말한다. “나 축구 싫어하는데?” <생방송 우리집 유치원>은 코로나19로 유치원과 어린이집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마련된 방송이다.

“그런데 왜 <해요와 해요>에는 남자가 왜 이렇게 많고 여자가 한명이어야 돼?” 네 살짜리 아이는 EBS <해요와 해요>에서 요일마다 등장하는 각 분야 전문가 가운데 왜 여성이 한명뿐인지 궁금하다. 또 다른 아이는 캐릭터의 체형과 의상이 불만이다. “레이디버그는 너무 몸매가 쏙 들어가고 배가 아예 없는 것 같고, 세미는 팬티 보이랑 말랑한 치마를 입고 점프해.”

시민단체 ‘정치하는엄마들’ 활동가의 자녀들이 EBS 프로그램을 보고 난 뒤 보인 반응이다. 엄마들은 ‘미디어에 다양한 색을, 아이들에게 다양한 삶을’이라는 슬로건으로 EBS가 제작에 참여하고 방영한 프로그램을 성평등 관점에서 분석했다.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의 제안으로 시작된 모니터링에는 총 9명이 참여했다. 2020년 상반기에 방영된 EBS 애니메이션, 유·아동 대상 스튜디오 프로그램을 양적·질적으로 분석한 결과, ‘2020 대중매체 성평등 내용분석 보고서’ 두 편이 나왔다.

30년 전, 엄마들은 지구와 사회적 약자를 구하는 사람들은 전부 남성인 영웅 만화, 왕자가 공주를 구한 뒤 청혼하고 공주가 기쁘게 화답하는 러브스토리를 보며 자랐다. 2020년 한국 공영방송의 영유아 프로그램은 어떻게 달라지고 있을까.

하나하나 뜯어보다

코로나19로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TV·온라인 콘텐츠를 보는 시간도 덩달아 늘었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콘텐츠가 넘쳐흐르는 만큼 고르기가 어렵다. 초등학교 2학년이 되는 아이와 유치원생 아이를 키우는 남궁수진씨(41)는 “EBS는 쉽게 걱정 없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라 말한다. “아이들에게 TV·스마트폰 보여주는 시간을 줄이라고 하지만, 요즘같이 코로나19로 집에만 있을 때는 미디어가 일종의 ‘보모’거든요. EBS는 대국민 교육방송을 표방해요. 과연 이름에 걸맞게 하고 있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학실험을 하는 해외의 아동 프로그램에 임신한 여성이 선생님으로 등장한 것을 보고 ‘우리는 저런 콘텐츠가 불가능할까’ 생각한 적이 있다. 아이들이 상상력을 발휘하면서 다양한 삶을 수용할 수 있도록 돕는 콘텐츠가 나오길 바라면서 모니터링에 나섰다.

쉽지 않았다. 콘텐츠를 분석할 객관적 틀부터 만들어야 했다. 캐릭터의 체형이 ‘마르다’는 기준이 서로 달랐다. 캐릭터 성별이나 주연·조연을 판단하는 시각도 제각각이었다. 아이들에게 묻고, 홈페이지에 올라온 정보를 참고하며 기준을 잡아나갔다. 수차례 화상회의를 했다. 대개 밤 10시쯤 아이들을 재운 뒤였다.

겉보기에는 꽤 괜찮은 프로그램들이 많았다. 본격적으로 모니터링을 시작하기 전까진 ‘별문제가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분석해나갈수록 문제가 선명해졌다. 애니메이션의 경우 캐릭터 720명(회차마다 중복 집계) 가운데 남성은 60%였지만 여성은 30%에 머물렀다. 마른 몸을 가진 비율도 여성이 더 높았다. ‘여성은 분홍’이라는 고정관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장애를 가진 캐릭터는 단 한명도 없었다. 동물 주인공들이 로봇 특공대원으로 변신해 악당을 물리치는 <미니특공대 슈퍼공룡파워>를 보자. 주인공 5명 중 여성 캐릭터는 ‘루시’ 1명뿐이다. 남궁씨는 “남자 캐릭터는 4명이니 똑똑하지만 까탈스러운 애, 게으르지만 다른 친구를 배려하는 애, 용감하지만 덜렁거리는 애같이 성격과 색깔을 입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여자 캐릭터는 한명이다 보니 분홍에 조신하고 부드러운 성격으로 단선적인 표현밖에 안 된다”고 말했다. 강미정씨(39)는 “아무리 여성 캐릭터에 활력을 넣고 다양함을 드러내려 시도해도 일단 그 숫자가 너무 적다 보니 한계가 보였다”며 “EBS가 바뀌려고 한다면 복잡하게 고민할 것 없이 성비만 고르게 분배해도 확 달라질 것”이라고 했다.

강미정씨와 아이가 영상 콘텐츠를 보고 있다. 노도현 기자

강미정씨와 아이가 영상 콘텐츠를 보고 있다. 노도현 기자

강씨는 딸아이가 재미있게 보는 <미라큘러스-레이디버그와 블랙캣>이 마음에 걸렸다. 평범한 소녀가 마법의 힘으로 슈퍼히어로로 변신하는 이야기다. 여성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운 것은 긍정적이지만 면면이 아쉽다. 그는 “캐릭터들이 볼륨 있는 체형에 딱 붙는 고무 슈트를 입고 이야기를 진행하는데다 중년 남성이 아이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조종하는, 위험해 보이는 설정이 아무렇지도 않게 드러난다”며 “유아프로그램 안에 이런 요소들이 너무 익숙해져 버린 게 문제”라고 했다.

소수지만 의미 있는 시도도 눈에 띄었다. 엄마들은 <딩동댕 친구들- 장난감 나라의 비밀>의 ‘가족 노래자랑’ 편을 긍정적으로 꼽았다. 친구들끼리 가족 노래자랑에서 상을 타기 위해 엄마, 아빠, 아이 등 역할을 나눠 심사위원들을 속인다는 설정이다. 결국 탄로가 나는데 심사위원들은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있다’는 반응을 보인다. “우리는 가족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봤습니다. 가족은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하면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죠. 하지만 가족의 형태가 꼭 이렇다 하고 정해져 있는 건 아닙니다. 할아버지·할머니·손자로 이루어진 가족도 있고, 엄마와 딸이 오손도손 사는 가족도 있고. 고모·고모부·조카가 함께 사는 가족, 혼자 사는 1인 가족, 강아지와 함께 사는 가족…. 이렇게 가족은 다양한 형태를 지니고 있습니다.”

역할 바꾸기를 넘어서

“더 많은 정상성에 대한 질문을 아이들 시각으로 아이들 프로에서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요즘 아이들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돼서부터 스마트폰을 보고, 아이 때 장기적으로 누적된 선입견이 오래 가니까요. 우리에겐 이게 너무 시급한 문제예요.” 강미정씨가 말한다.

강씨는 영유아 프로그램이 단순한 ‘역할 바꾸기’를 넘어서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는 “아빠가 앞치마를 두른다든지 전통적인 성역할을 바꾸려는 시도는 보인다. 하지만 단순 에피소드로 그칠 뿐 캐릭터 설정이라든지 서사구조는 기존의 가부장적인 관점에서 머물러 있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남궁수진씨도 ‘진정성’이 담긴 변화가 필요하다고 봤다. “<생방송 우리집 유치원>에서 한번은 된장을 담그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여자아이가 ‘우와, 우리 엄마는 마트에서 사는데’라고 얘기하니, 남자아이가 아빠를 쳐다보며 ‘우리 아빠는 간장, 된장, 고추장 다 만들어’라고 말해요. 단순히 역할만 바꾼 거죠. 철학도 진정성도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젠더균형 가이드라인을 넘어 제작인력에 더 많은 여성을 충원하고 재원을 써야 한다는 이야기들이 나오는 게 아닐까요.”

엄마들의 보고서로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객관적 근거가 생겼다. 콘텐츠의 실질적인 변화가 뒤따를 차례다. 강씨는 “이 결과물을 제작자들과 공유하고 소통해나갈 것”이라며 “지금의 양육자들이 성평등 문제를 시급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만큼 제작자들이 보다 더 고민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3학년에 올라가는 딸이 있는 이민경씨(41)는 “여전히 EBS에서는 내가 ‘국민학생’이었던 30년 전처럼 왕자가 공주를 구하고 청혼하고 있으며 공주는 수줍게 승낙하고 있다”며 “꾸준히 기존의 성역할에 대해 아이와 이야기를 나눠왔지만 아이가 여성을 그릴 때면 무의식적으로 속눈썹, 치마, 긴 머리로 표현하는 것을 보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말하는 성평등이란 단지 아빠가 밥하고 엄마가 수리하는 역할 바꾸기가 아니다. 모니터링의 결과로 나온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발, 아니 여러발 나아가는 교육방송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엄마들의 모니터링 보고서 “성평등, 어쩌다 아닌 일상이 돼야”

보고서는 보다 큰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숫자’로 보여준다. 결론은 이렇다. “변화의 조짐이 없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여전히 가부장제 사회의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에서 크게 벗어났다고 이야기하기도 어렵다.”

우선 지난해 상반기에 방영된 애니메이션 프로그램 중 EBS가 작품 제작에 관여했으며, 선호도가 높은 19개의 프로그램을 들여다봤다. 3~5회분씩 총 70회차 86개의 에피소드를 분석했다. 가장 돋보이는 문제는 성비 불균형이다. 총 720명(중복)의 전체 캐릭터 가운데 남성 캐릭터는 60%(432명)에 이른다. 여성 캐릭터는 29.7%(214명)에 그쳤다. 나머지 10.3%(74명)는 성별을 확인할 수 없었다. 기계, 변신인물 같은 기계형 캐릭터 4명당 1명이 성 중립적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은 반가운 일이었다. 하지만 여성 캐릭터의 비중은 매우 낮았다. 장애를 가진 인물은 아예 없었다.

전체 성비 불균형은 주연, 조연, 단역 등 인물들이 담당하는 역할의 성비 불균형을 초래하는 근본 원인이 됐다. 주연, 조연, 1회성 주·조연, 단역으로 나눠보면 모든 캐릭터의 위치에서 남성의 비율이 여성보다 높았다. 주연보다는 조연·단역에서 남성의 비중이 높았다. 보고서는 “이는 남성 캐릭터들의 숫자가 여성의 2배에 이르는 점, 여성 캐릭터들이 ‘끼워 맞추기식’으로 에피소드를 주로 이끌어가는 역할을 맡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예상 가능한 현상”이라고 봤다.

애니메이션 <미니특공대> 캐릭터들. 분홍색으로 표현된 ‘루시’(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유일한 여성 캐릭터다.

애니메이션 <미니특공대> 캐릭터들. 분홍색으로 표현된 ‘루시’(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유일한 여성 캐릭터다.

외모, 색감 등도 고정관념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전체 캐릭터의 신체 타입은 ‘3등신’이 41.5%로 가장 많았다. 동물 캐릭터 대부분이 3등신이기 때문이다. 그 뒤를 차지한 것은 마른 몸이다. 마른 몸의 비율은 남성(14.3%)보다 여성(30.6%)에게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색의 다양성이 존재한다고 해도 여성 캐릭터만 꽃핀, 목걸이, 속눈썹, 높은 구두 등으로 표현되곤 했다.

갈등 상황이 드러난 67개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인물 533명(중복)을 분석해보니 위험에 빠진 인물이나 문제를 해결하는 역할에서 남녀 간 차이는 크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여성 캐릭터 가운데 리더(54.2%)나 멘토(11.9%) 역할을 맡은 비중은 남성(리더 50.0%, 멘토 10.0%)보다 살짝 높았다. 보고서는 “여성 인물들이 에피소드를 이끌고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선다는 점은 긍정적”이라면서도 “이러한 특성이 여성 인물의 수가 적기 때문에 비롯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향후 보다 많은 여성 캐릭터가 등장했을 때 어떤 변화가 나타날 것인가를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물의 기질·성격 측면에선 남녀 캐릭터들 모두 협력적이고 상황판단이 빠르고 주체적인 인물 비중이 높았다. 흔히 여성의 특성으로 여겨지는 ‘감정적’과 ‘보살핌’은 여전히 여성 인물에게서, 남성적 특성으로 분류되는 ‘책임감’, ‘공격성’, ‘도전적’ 등은 남성 인물에게서 보다 자주 나타났다.

스튜디오 프로그램을 보자. <생방송 보니하니>, <딩동댕 친구들- 장난감 나라의 비밀> 등 영유아 대상 스튜디오 자체제작 프로그램 8편, 총 113회 분량의 성비와 역할 등을 분석했다. 등장인물 1018명(중복)의 성비는 남성 48.6%(495명), 여성 41.7%(424명)였다. 메인진행자, 보조진행자, 멘토·선생님, 게스트, 단역으로 역할을 나눠보니 게스트를 제외한 나머지 역할에서 남성 비중이 대체로 높았다. 1차적으로는 전체 인물의 성비 불균형에서 비롯된다. 특히 문제를 해결하는 역할인 선생님·멘토 캐릭터에서 86명 가운데 74.1%(86명)가 남성으로 높게 나타났다. 보고서는 “등장인물의 수적 불균형뿐만 아니라 캐릭터의 비중상의 성비 불균형 역시 개선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했다.

스튜디오 프로그램에서도 성격, 외모 등에서 성별의 전형성이 드러났다. 여자아이들만 리본을 달고 나오는가 하면 어린이와 성인을 가리지 않고 여성 출연자가 유독 짙은 화장을 한 모습도 보였다. 보고서는 “전통적인 성별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들이 어쩌다 한번이 아니라 일상으로 정착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그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고 했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2101101005011#csidx6995496c43530b2a65ee73b52999f1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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