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컷뉴스] '분홍색은 여아, 파란색은 남아'…인권위 "성차별 편견 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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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색은 여아, 파란색은 남아'…인권위 "성차별 편견 심화"

 

정치하는엄마들, 지난해 진정…"영유아 성역할 고정관념 강화"
"가치관 형성에 중요한 시기…성별 따른 색깔 구분 탈피해야"
진정은 '각하'…"상품별 성별은 표기했지만 구매 제한 없어"

 

어린이날을 사흘 앞둔 2일 오후 서울 시내 한 장난감 가게를 찾은 시민들이 장난감을 고르고 있다. 연합뉴스

 

문구와 의류 등 영·유아 상품이 성별에 따라 색깔이 구분되는 것은 아동들의 권리를 침해한다는 시민단체 진정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가 "성차별 편견을 심화할 수 있다"는 의견을 내놨다. 다만, 색깔을 성별로 분류하는 것이 구매제한으로 직결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진정 자체는 각하했다.

 

인권위는 4일 영유아 상품을 생산·판매하면서, 기능과 무관하게 '분홍색은 여아용, 파란색은 남아용' 등 색깔을 성별로 구분해 표기한 행위는 성(性)역할 고정관념을 학습하게 하는 등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며 "이같은 방식을 탈피해 성중립적인(gender-neutral) 방향으로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의견을 표명했다.

 

앞서 시민단체 정치하는엄마들은 지난해 1월 "상품 기능과 무관하게 영유아 물품에 '분홍색은 여아용, 파란색은 남아용'으로 표시하는 것은 아이들이 원하는 색상을 선택할 권리를 현저히 침해하는 행위"라며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했다. 이들은 △더블하트(유한킴벌리)의 젖꼭지 △오가닉맘(중동텍스타일)의 영유아복 △BYC의 속옷 △메디안(아모레퍼시픽)의 칫솔·치약 △모나미의 연필·크레파스 등을 구체적 피해사례로 제시했다.

 

인권위 조사과정에서 피진정기업들은 "성차별 조장 의도는 없었고 단순히 현장에서 소비자의 구매 및 판매사원의 진열·판매의 편리함을 위한 표기였다", "사회·문화적 관행에 익숙한 소비자의 선호를 반영한 것" 등의 주장을 한 것으로 파악됐다. 다만, 대체로 진정인 측의 문제제기에 공감의 뜻을 표하며 기존의 '성별 표기'를 삭제한 것으로 나타났다. 향후 자사 제품의 '성중립적' 디자인 및 표기 개선을 약속하기도 했다.

 

인권위는 국가인권위원회법에 비춰볼 때 해당 진정이 '구체적 피해사실'이 존재하는 사건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인권위는 "피진정인들이 기업의 상품 판매전략에 따라 상품의 색깔을 성별구분 기준으로 삼아 상품에 성별을 표기하고 있으나, 이로 인해 소비자가 해당상품을 구매하는 행위에 제한이 있거나 차이가 발생하지는 않는다"며 각하했다. 하지만 진정이 담고 있는 문제의식에는 충분히 합리적 근거가 있다고 판단했다. 인권위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발표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2000년 이후 성별 임금격차가 가장 큰 나라 1위로 매년 최하위를 면치 못하는 등 여전히 정치·사회·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성 격차가 심각한 상황"이라며 "시대변화와 지속적 성차별 시정 노력에도 불구하고 성차별적 사회문화가 우리 사회에 여전히 잔존하기 때문"이라고 짚었다. 그러면서 "영유아기는 사회규범을 내면화하고 성역할을 습득하는 등 개인의 가치관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시기로, 성역할 고정관념 등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기 쉬운 시기"라며 "이 시기 제공되는 놀이·경험 등의 환경은 아이들로 하여금 그것이 자신에게 적합하다는 인식을 자연스럽게 갖게 한다. 그 결과 행동이나 태도, 놀이와 직업을 선택할 때 스스로가 원하는 것이나 재능·가능성이 아닌 성(性)에 대한 정형화된 관점을 따르는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부연했다. 또 현재는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색깔에 대한 고정관념이 시대적 변화의 산물임을 지적했다.

 

스마트이미지 제공

 

 

인권위는 "20세기 초까지는 성별에 따른 색깔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았고 표백 등 세탁이 용이한 흰색 옷을 주로 입었다. 오히려 현재와는 정반대로 분홍색이 남성의 색으로 여겨졌는데, 당시 군복의 색이자 열정을 상징하는 색이었던 빨간색의 '파스텔 버전'이 분홍색이었기 때문"이라며 "성모마리아의 '정결'을 상징하는 파란색은 여성의 색으로 여겨졌던 시기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20세기 중반 이후 산업체계가 '다품종 소량생산' 방식으로 전환된 것이 분기점이라고 분석했다. 인권위는 "이때부터 상품에서 색깔에 따른 성별 구분이 생기기 시작했고, 1980년대 이후에는 본격적 판매전략으로 자리잡게 됐다"며 "영유아용 상품 중 가사도구(소꿉놀이)·인형 등은 여성성을 상징하는 분홍색 위주로 제작되고, 자동차나 공구세트 같은 기계류 등은 파란색 계열로 제작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를 통해 아이들은 '여성은 연약하고 소극적이고, 남성은 강인하고 진취적'이라는 성역할 고정관념을 학습하게 되고, 가사노동이나 돌봄은 여성의 역할이라는 인식을 갖게 된다"며 "이러한 성역할 고정관념은 아이들의 미래의 행동, 가치관 및 직업선택에 영향을 주게 된다"고 강조했다. 해외에서도 소비자들의 지속적 비판을 통해 성별로 나뉘는 상품 구분이 사라지는 추세라는 점도 언급했다. 세계 최대 온라인쇼핑몰 '아마존'은 지난 2015년 5월부터 남아·여아로 구분하던 아동용 완구를 '아동완구'로 통합 운영 중이다. 미국과 영국의 완구 매장들도 이미 성별 구분을 없앤 곳이 상당수인 것으로 파악됐다. 인권위는 "영유아 상품의 성별 구분은 단순한 '구분'에 머무르지 않고 취향에 영향을 줄 뿐 아니라 미래에 능력을 펼치고 모색하는 데 제한을 주는 등 성역할 고정관념과 차별적 성인식을 강화하게 된다"며 "영유아들이 경험하는 환경은 그들의 인식과 태도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치므로 기업도 일부 사회적 책임이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정치하는엄마들 장하나 사무국장은 "인권위 결정을 오랫동안 기다렸다. 진정 건은 각하했지만, 각 업체의 입장과 사후 시정계획이 다 담겼고, (진정) 취지를 인권위가 전면적으로 수용했다"며 환영의 입장을 밝혔다. 장 사무국장은 "(진정대상인) 8개 특정업체만 바꾸려 한 것은 아니고 모든 영유아 관련제품과 업계에 다 영향을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했던 진정"이라며 "이런 상식이 국민들에게도 많이 퍼지고, 업체들도 변화의 노력을 기울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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